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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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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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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 빨리 잡으라고.”
“무서워서 못 잡겠어.”
“뭐가 무서워, 격투기 프로 선수가
닭 한 마리도 못 잡냐?”
“뾰족한 부리로 나를 물 것 같아.”

팔월은 뜨거웠습니다. 가만히만 있어도 등골로 땀이 흘러내렸습니다. 우리 마을은 서울에서 온 교회 청년들의 농촌봉사활동으로 활기차고 분주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을 어르신들의 마음도 청년들과 함께 일하고, 함께 대화하고, 함께 밥 먹으면서 사랑으로 풍성해졌습니다. 챙 달린 모자를 쓰고 면장갑을 끼고 호미 혹은 낫을 든 모습은 농부를 좀 닮았지만 일하는 것은 영 서툴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봉사활동을 다 마친 날 저녁, 닭을 잡아먹기로 했습니다. 단순히 닭을 잡아먹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 구약에 나와 있는 속죄제사를 체험하기로 했습니다. 닭을 잡는 과정을 설명하는데 여기저기서 작은 비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들의 손으로 닭을 죽인다는 것이 끔찍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많은 닭고기를 먹었지만 살아있는 닭을 죽이는 것은 처음 해보는 일일 것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소나 양으로 하나님께 속죄제물을 드리려는 사람은 그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직접 죽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제물을 가져 온 사람은 거기 주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아야 하고,”(레1:4~5. 표준새번역) 제사장은 거기서 나오는 피를 제단에 뿌리는 일을 했습니다. 청년들에게 닭을 잡아오는 역할, 닭을 손작두 날 위에 올려놓는 역할, 작두로 닭의 목을 치는 역할로 나눴습니다.

잡으려고 쫓아다니는 청년들 앞에서 닭은 요란스럽게 울어대고 날갯짓하면서 도망 다녔습니다. 격투기 프로 선수인 청년이 닭을 간신히 잡아왔습니다. 잡아온 닭을 청년자매에게 넘겼습니다. 자매는 한 손으로 닭의 두 날개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두 다리를 움켜잡았습니다. 닭을 잡고 있는 손은 떨고 있고, 고개를 돌리고 눈은 찡그리고, 목소리는 거의 울 것 같았습니다. 
닭의 목을 손작두 날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습니다. 날개와 다리를 잡힌 닭은 더 이상 요동하지 않고 조용했습니다. 작두에 자신의 목이 있음에도 닭의 태도는 매우 평온했습니다. 닭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전혀 갖지 않았습니다. 곧 죽게 될 자신에 대한 어떤 인식도 없음을 보았습니다. 오히려 옆에서 지켜보는 청년들은 무서워하면서 얼굴을 서로 기대어 눈물을 훔치면서 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작두의 손잡이를 잡은 청년에게 성경말씀을 외친 후에 닭의 목을 내리치라고 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이 없느니라!”(히13:9) 덩치 큰 청년이었는데 막상 닭의 목을 내리치려고 하니 용기가 없어서 제대로 성경말씀을 외치지도 못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피흘림, 피흘림... 죄사함, 죄사함....”을 복창했습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손에 힘을 주고 내리치려다가 주저주저하면서 닭에게 말했습니다. “정말 미안하다. 미안해” 하면서 내리쳤습니다. 순간, 작두의 두 날이 서로 갈리는 소리가 나더니 닭의 목이 잘리고 피가 솟구쳐 나왔습니다. 목이 잘린 닭을 풀밭에 던져 놓자 퍼덕퍼덕 거리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녔습니다. 닭의 목을 친 형제나 그것을 지켜보던 자매들은 울고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닭의 목을 친 청년은 울면서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면서 울부짖었습니다. 청년들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위로했습니다. 그 청년은 새로운 결심을 한 듯 하늘을 향해 외쳤습니다. “나 이제부터 치킨 안 먹어. 진짜 안 먹을 거야!”

이것을 통해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죽임을 당하는 닭의 모습에서 놀라운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닭을 잡고 있는 청년이나 닭의 목을 작두로 내리치면서 죽이는 청년이나 모두 극도의 불안감에 압도되었지만 죽음의 칼날 위에 놓인 닭은 오히려 잠잠하고 평온했습니다. 자기를 죽이기 위해 모여 있는 청년들을 멀뚱멀뚱 바라보았습니다. 닭의 그런 모습에서 닭이 가지고 있는 엄청나게 넓은 세상을 느꼈습니다.

죽음에 대한 극도의 공포감은 사람만이 가지는 특별한 감정인 것 같습니다. 사람은 죽음 앞에 서면, 절망이 그를 완전히 삼켜버립니다. 우리가 죽음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면 그리고 죽음을 넘어설 수만 있다면 얼마나 놀라운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돌에 맞으면서도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았던 스데반은 죽음 너머에 있는 주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자 굴에 있던 다니엘, 복음을 위해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행20:24) 아니한 바울은 죽음 너머에 있는 세계를 소유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넘어 서자!” ( 홍동완목사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