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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 침례교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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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교는 유아침례를 인정하지 않으며, 교단조직이 다른 교단에 비해 개교회중심적이면서도 교회의 운영이 보다 민주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침례교는 루터교나 장로교와 같이 개신교 교파 가운데 비교적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가장 큰 교단이며 우리나라에서도 4대 개신교 교파 안에 포함되는 교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례교는 장로교와 감리교에 비해 비교적 덜 알려져 있는 교파이다 

 

. 침례교의 특징

침례교는 루터의 교회개혁 이후 개신교의 여러 교파들에 비해 비교적 일찍이 출현한 교파이다. 일반적으로 침례교는 개신교 여러 교파들 가운데 좌파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침례교는 신약의 본질적인 원리를 지키는 교회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원형적인 교회(Primitive Church)로서의 신약교회(New Testament Church)의 신앙을 전승하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침례교는 당시 교회개혁이 지향하였던 여러 가지 목표들을 짐짓 극단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밀고 나갔던 교파이다. 침례교는 루터가 유아세례와 성찬식을 로마카톨릭의 방식대로 계승했다는 점에서 그의 개혁이 불충분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침례교는 무엇보다도 침례나 성찬식과 같은 교회의식이나 조직 면에서 성경에 가장 근접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침례교가 성경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침례교의 의식, 교리, 조직, 대사회적 측면으로 나누어 침례교의 특징을 살펴본다.

 

1. 의례적 측면

침례교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침례를 통해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침례교의 첫 번째 특징은 침례의 방법에서 찾을 수 있다. 다른 교파들은 주로 물을 뿌리는 방법에 의해 세례를 주고 있는 것에 비해 침례교는 아예 물 속에 담그는 방법을 통해 세례를 주고 있다. 침례교는 다른 교파들에 비해 이와 같이 세례를 주는 방법을 달리하고 그 방법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본래 세례라는 말 대신에 뱁티스마(baptisma)’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원하였다. 캐나다인으로 우리나라에 온 침례교 최초의 선교사이며, 주한 외국선교사들로 구성된 성경번역위원회의 부회장으로 있던 말콤 C. 펜윅(Malcom C. Fenwick, 1863-1935)‘baptism’을 세례 대신 뱁티스마로 번역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다가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부회장직을 사퇴하고 바이블을 혼자 번역할 정도였다. 그러나 침례교는 뱁티스마라는 용어가 일반에 생소할 것을 우려하여 뱁티스마라는 용어는 포기하되, 세례라는 용어 대신 침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침례교에 의하면 중세까지 모든 교회는 대체로 침수침례를 행하였다.

 

그러나 1311년에 개최된 라벤나 회의는 침수례가 로마가톨릭교회의 유일한 세례 방법이며 침수침례는 이단이라고 결정하고, 침수침례를 행하는 자들을 사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그 뒤부터 침수침례는 침례교의 가시적인 첫 번째 특징으로 지적되어 왔다.

 

이와 같이 침례교는 침수침례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믿는 자들 만이 침례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침례교에 의하면 신약교회는 믿는 자들 만이 침례를 받았으며, 믿는 자들만이 구원을 받았다. 침례 때 물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물에 완전히 잠기는 것은 장사 지냄을, 그리고 물에서 나오는 것은 부활을 의미한다. 그런데 만약 믿지 않는 사람이 침례로 인해 몸이 물에 잠겼다면, 그것은 물에 젖지 않은 죄인이 물에 젖은 죄인으로 바뀐 사실 이외의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침례교는 모태교인을 인정하지 않으며,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어린 아이는 자기의 믿음을 보여 줄 수 없음으로 유아세례는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좋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물론 유아세례에 대한 침례교의 이러한 입장은 재침례파(Anabaptist)의 그것과 일맥상통한다.

 

이와 같이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침례교는 세례를 받았건 안 받았건 일찍 죽은 어린 아이는 모두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침례교는 무지에 의한 죄도 예수에 의해 대속되었는데 어린 아이의 죄가 무지에 의한 죄에 포함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침례교는 침례가 곧 구원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서 침례교인에게 침례는 구원을 받기 위한 필수 조건이 결코 아니다. 침례는 죄를 씻지 못한다. 따라서 죄를 씻기 위해 침례를 받는 것은 의미가 없다. 침례교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침례를 못 받았다고 해서 구원을 못받는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침례교는 침례를 상징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침례교인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침례교인에게 침례의 이유는 예수가 전도하라는 명령과 가르치라는 명령 못지 않게 침례를 주라고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침례교인에게 침례는 단지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의미한다. 침례교는 확실히 믿지 않고 철저히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 침례를 행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인위적인 기간이 지난 후가 아니라 확실히 믿고 있다는 증거만 있으면 침례를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침례교는 로마카톨릭이 7대 성사를 행하는 것과 달리 개신교 일반과 마찬가지로 침례와 성찬식만을 성사로 인정한다. 그런데 성찬식에 대한 침례교의 입장은 카톨릭은 물론이고 개신교의 다른 교파들과도 상이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성찬식에 대한 기독교 각 교파의 입장은 크게 화체설(transubstantiation), 공재설(consubstantiation), 그리고 상징설(symbolism)로 구분할 수 있다. 화체설은 로마 카톨릭의 입장으로 성찬식 때 사제에 의해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목과 피로 변한다는 견해이다. 이 경우 그리스도가 떡과 포도주에 임재하기 때문에 성찬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거나 없는 사람이거나 간에 똑같이 작용한다고 믿어진다. 공재설은 루터와 칼빈의 입장으로 다시 구분된다. 루터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방법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떡과 포도주 안에, 함께 그리고 가운데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 입장에 의하면 역시 성찬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나 믿음이 없는 사람도 성찬을 받을 수 있다고 믿어진다. 이에 비해 칼빈은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하여 떡과 포도주에 임재한다고 믿고 성찬은 오직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만 작용한다고 믿었다.

 

화체설과 공재설은 비록 그리스도가 어떻게 임재하는지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가 떡과 포도주에 임재한다는 점에서는 견해를 같이 한다. 상징설은 이와 달리 그리스도가 떡과 포도주에 실제로 임재하는 것이 아니라 떡과 포도주는 단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할 뿐이라는 견해이다. 침례교는 츠빙글리에서 비롯된 이 상징설을 지지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다른 교파들과 대비된다.

 

침례교는 침례가 교인권의 시작이라면, 성찬식은 교인권의 점검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침례교는 아무리 기도를 해도 떡은 떡 그대로, 포도주는 포도주 그대로 남아 있다고 믿으며, 성찬을 이와 같이 은유적 표현으로 보는 견해가 바이블에 가장 가까운 견해라고 생각한다. 공재설 가운데 루터와 칼빈의 입장을 개방적 성찬식과 폐쇄적 성찬식으로 구분한다면 침례교는 이 양자의 입장을 함께 견지하여 침례교 내부적으로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다.

 

2. 교리적 측면

침례교는 교파신학이나 헌법 혹은 특별한 신조를 두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 침례교는 교리도 없고 신앙고백도 없는 것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침례교 역시 하나의 교파로 존재하는 한 교리적인 측면의 특징이 없을 수 없다.

 

침례교는 무엇보다도 바이블에 무한정의 권위를 부여하며 성경무오설을 지지한다. 침례교에 의하면 권위는 오직 살아있는 그리스도로부터 오며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신약성서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침례교 최초의 선교사였던 펜윅은 무엇보다도 바이블의 한글 번역에 힘을 썼으며, 바이블 읽기를 장려하였던 것이다.

 

침례교는 바이블에 대한 교단의 권위있는 해석보다 개개인의 자유로운 해석을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펜윅은 신도들이 바이블의 어려운 구절에 부닥쳤을 때 남의 도움을 빌어 해석하기보다는 수차 그 구절을 읽으면 성령이 필요에 따라 알게 할 것이라고 가르쳤다. 침례교는 바이블에 무한정의 권위를 부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도 개개인이 누구나 자신의 양심에 따라 바이블을 해석할 수 있으며, 과학과 교육에 의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할 때에는 그에 따라 신앙을 수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아마도 이러한 입장은 침례교가 영적 개인주의와 양심의 자유, 그리고 영혼의 자유와 개인의 책임을 다른 어느 교파보다도 강조하여 모든 신자가 똑같이 제사장의 지위를 지닌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침례교에도 교파 나름의 신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침례교는 대체로 웨스트민스터문답서와 필라델피아신앙고백서를 지지하다가 1925년에 가서야 일반적으로 뉴 햄프셔 신앙고백(New Hampshire Confession)’으로 알려져 있는 신앙고백을 채택하여 신앙의 표준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침례교는 1962년에 이르러 이 뉴 햄프셔 신앙고백을 수정, 보완하여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Baptist Faith and Message)’라는 신앙고백을 채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침례교는 이 신앙고백서가 최종적이며 오류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며, 만약 새로운 상황이 도래한다면 적절한 시기에 이 신앙고백서를 수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가 미국 남침례회라는 침례교의 대표적인 교단에서 채택된 신앙고백서라고 해서 이 신앙고백서를 모든 침례교 교단이 승인할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침례교의 다른 교단은 물론이고 미국 남침례회에 소속된 침례교 교회라고 할 지라도 나름대로의 신앙고백서를 만들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고백서는 어디까지나 바이블 해석에 도움이 되는 지침일 뿐 이것이 모든 침례교인의 신앙을 좌지우지할 권위를 지닌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서 침례교는 개신교의 다른 교파와 달리 信條가 신도들의 양심을 구속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한편, 침례교는 신과의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소통과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집단적으로 신과 올바른 관계를 수립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침례교 내부에는 다양한 신앙 양상을 보일 가능성이 내재해 있다. 예를 들어서 1731년에 런던에 있던 침례교 목회자 25명 가운데 7명은 율법폐기론자 혹은 고등칼빈주의자, 7명은 칼빈주의자, 6명은 알미니안주의자, 3명은 유니테리언주의자, 그리고 2명은 제7일 안식교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교적 침례교 초기의 목회자들이 이렇게 다양한 신학적 성향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침례교가 개인 나름의 신앙을 존중하는 성향을 지녔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침례교가 1950년대에 다른 교파의 목사들을 대거 영입할 수 있었던 것도 물론 이러한 맥락에서만 이해가 가능하다.

 

침례교는 이와 같이 개인의 체험적인 신앙을 강조하기 때문에 교단 나름의 신학을 정립하는 데 비교적 관심을 덜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침례교의 신학적인 성향을 개신교 대표적인 교파인 장로교와 감리교와 어느 정도 비교해 볼 수 있다.

 

영국침례교는 초기에 알미니안주의를 따르는 일반침례교와 극단적인 칼빈주의를 따르는 특수침례교로 양분되어 전개되었다. 알미니안주의는 네델란드의 알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60-1609)에서 비롯되었다. 알미니우스는 극단적 칼빈주의에 반대하여 인간의 자유의지의 교리와 함께 인간은 자신의 구원에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알미니우스에 의하면 인간이 살고 죽는 문제는 최종적으로 신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고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 또한 알미니우스는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다고 가르쳤으며, 은혜로부터 타락이 가능하다고 하고 성령의 불가항력적 사역을 부인하였다.

 

장로교가 이러한 알미니안주의를 인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161811월과 16195월 사이에 열린 돌트회의(the Synod Dort)에서 알미니안주의는 장로교로부터 철저히 단죄되었다. 이 과정에서 칼빈주의 5대 요점이라고 알려진 ‘TULIP’이라고 알려진 칼빈주의의 5대 요점이 제시되었다. ‘TULIP’ 가운데 여기에서 장로교의 특징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어떤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미리 정해져 있고 또 다른이들에게는 영원한 저주가 미리 정해져 있다는, 다시 말해서 신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소위 예정론과 인간이 회심하여 한번 구원을 받으면 이 구원의 효력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교리이다.

 

감리교는 신이 회심한 사람일지라도 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나가는 자유를 부여했다는 소위 은총으로부터의 타락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학적으로 칼빈주의보다는 오히려 알미니안주의에 가까운 성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국의 초기 침례교는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알미니안주의를 지지하는 일반침례교와 극단적 칼빈주의를 따르는 특수침례교로 양분되어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일반침례교 내에 온건한 칼빈주의를 토대로 한 복음적인 침례교 교리가 출현하게 되어 18세기말에 일반침례교와 특수침례교가 통합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칼빈주의의 장로교와 알미니안주의의 감리교와 비교해 볼 때 침례교의 신학적 경향이 장로교 쪽에 가까운 온건한 칼빈주의의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3. 조직적 측면

침례교는 원칙적으로 철저한 개교회주의를 지향한다. 비록 개교회가 모인 지방연합회, 그리고 지방연합회가 모인 총회가 있기는 하지만 이들 3자는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 협동의 관계이다. 따라서 침례교의 교단 조직은 한마디로 개교회주의에 입각한 협동적 연합체라고 할 수 있다. 침례교의 이러한 교단 조직은 로마 카톨릭은 물론이고 개신교의 다른 교파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침례교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자치권과 자결권을 가지는 침례교의 개교회는 감독제도나 장로제도와 대비되는 회중제도라는 조직 형태를 취한다. 감독제도는 감독이나 주교에 의해 치리되는 교회 형태로 로마 카톨릭, 영국 국교회, 프로테스탄트 감독교회, 연합 감리교회, 그리고 루터교의 일부가 채택하고 있다. 장로제도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는 당회가 교회를 치리하는 교회 형태를 말하는데 장로교가 이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대표적인 교파이다.

 

감독제도와 장로제도가 모두 중앙집권적인 조직 형태라면 회중제도는 보다 민주적인 조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회중제도 아래에서는 교회의 모든 문제가 회중 자신에 의해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결정된다. 회중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교파는 회중교회,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 그리고 침례교를 열거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침례교는 중앙집권적 조직 형태가 아니라 회중제도라는 민주적인 조직 형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성직자와 평신도는 기본적으로 동등한 권한을 가진다. 비록 개교회 내에 목사와 집사라는 직분이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직분은 계급의 직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기능의 직분으로 이해된다. 이런 조직 형태 내에서 신도 개개인이 자신의 의사를 보다 민주적으로 표시할 수 있는 기회를 보다 많이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침례교의 조직적인 측면에서의 특징은 한마디로 개교회의 자치와 회중의 권위를 강조한다는 점으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4. 대사회적 측면

침례교는 대사회적 측면에서도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선 침례교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로마 카톨릭은 물론 여타 개신교 교파들과 대비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침례교는 회중의 권한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회중교회와 비슷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침례교는 회중교회가 국가의 통제 아래 있으려는 것과 달리 국가가 교회에 대해 그 어떤 통제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회중교회와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장로교는 적어도 칼빈 당시에는 국가와 교회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하였고, 이러한 성향이 장로교에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침례교가 국가와 교회의 철저한 분리를 주장한 이유는 침례교가 처음 비롯된 영국의 종교상황으로부터 찾아 볼 수 있다. 헨리 8세에 의해 1534년 성공회가 국교로 지정된 이래 영국에서 성공회 이외의 교파들은 직,간접적인 피해를 받아 왔다. 그러다가 1689년 소위 신교자유령이 공포되면서 비로소 성공회 이외의 교파들도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아래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영국은 여전히 성공회를 국교로 인정하고 있다. 게다가 침례교는 미국에서 활동을 전개할 초기에 소위 유아세례를 부인한다는 이유로 알게 모르게 정치 주체나 다른 교파들로부터 적지 않은 피해를 받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침례교가 국가와 교회의 철저한 분리를 주장하게 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침례교는 국가가 특정 교파를 선호해서는 안되며 그 어떤 종류의 종교적인 견해에 대해서도 처벌할 권리가 없으며 특정 종교에 대한 지원을 위해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침례교는 1833년 영국 정부가 새로운 학교 설립을 후원하기 위해 각 종교단체에 매년 2천 파운드의 보조금을 지원하였을 때 배당된 보조금을 받지 않아 교파주의로부터 공립학교를 보호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입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침례교는 다른 교파에 비해 종교의 자유 획득에 일정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나, 한편으로는 교단유형론의 입장에서 볼 때 교회형이라기보다는 섹트형에 가까운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침례교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비교적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였으며, 영국, 유럽, 미국 등지에서 주로 서민들이나 노동자 계급에 더 많은 호소력을 지니고 파고 들었다. 그리고 개신교 교파 가운데 최초로 해외 선교를 시도한 케리(William Carey, 1761-1834)1793년부터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침례교가 이렇게 다른 교파들에 비해 일찍부터 해외 선교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침례교가 섹트형에 가까운 성향을 지녔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우리는 의례, 교리, 조직, 그리고 대사회적 성향을 중심으로 침례교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침례교가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세례의 방법으로 침례를 행하며 성찬식을 상징적으로 이해한다는 점, 신도 개개인이 바이블을 해석할 권리를 인정하고 있으며 신조가 다른 교파들에 비해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 그리고 비교적 융통성이 있는 칼빈주의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아울러 우리는 침례교가 개교회주의를 지향하며 회중의 권한을 강조한다는 점, 그리고 국가와 교회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 등을 알 수 있었다.

 

아래에서는 침례교의 이러한 특징을 염두에 두고 침례교의 발단에서부터 영국과 미국에서의 침례교의 전개, 그리고 이어서 우리나라에서의 침례교의 전개 과정을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 침례교의 기원

대체로 개신교의 여러 교파들은 그 기원을 정확히 추적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루터교는 1520년 독일에서 루터에 의해서 비롯되었으며, 영국성공회는 1534년 영국에서 헨리 8세에 의해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장로교는 1536년 스위스에서 칼빈에 의해 비롯되었으며, 회중교회는 1582년 영국에서 브로윈에 의해, 그리고 감리교는 1740년 영국에서 웨슬레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와 달리 침례교는 비록 그 교회의 최초 설립을 역사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침례교회의 최초 설립이 침례교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따라서 침례교가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확고하게 단언을 내리는 것은 의미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례교의 기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학설이 제기되어 있다. 첫째는 침례교 내부에서 제기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전승설이 있다. 이 설은 침례교가 요단강가에서 침례요한이 사역하던 그 때부터 지속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설은 침례교의 역사를 원시 기독교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는 사도전승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설은 역사적으로 용인되거나 고증된 학설로 볼 수는 없다.

 

둘째는 침례교가 재침례교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재침례교와의 영적 혈족설(The Anabaptist spiritual kinship theory)이 있다. 역사적으로 재침례교는 왈도파(the Waldensians), 페트로부르스파(Petrobrusians), 노바티안파(the Novatians), 그리고 도나티스파(the Donatists), 메노나이트파(the Mennonites) 등 여러 계보가 존재했었는데 이 설은 바로 침례교가 중생한 신도의 침례를 주장하는 이들 재침례교와 영적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대륙의 재침례교가 영국의 침례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를 찾아 내지 못하고, 다만 영국의 일반 침례교만이 이들로부터 약간의 영향을 받았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