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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 내려놓음 (이용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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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음 (이용규 지음)

 

1부 복의 통로가 되는 광야로의 부르심

 

하나님은 왜 내려놓으라고 하실까?

아들 동연이가 두 살 때 장난감 가게에 간 일이 있다. 동연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버즈 장난감을 두 팔로 꼭 움켜쥔 채 가게를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장난감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계산대에 내려놓고 바코드 판독기를 통과시켜야 했다. 점원이 동연이에게 장난감을 달라고 하자 동연이는 울며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날 결국 동연이는 장난감을 안은 채로 계산대 위에 올라가야 했다. 하지만 우리가 붙잡고 있는 문제들은 아이의 장난감처럼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나는 유학 생활과 몽골 선교를 통해, 내려놓아야 하나님의 것을 받는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체험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놓으라고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내려놓을 때 그것이 진정한 우리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하는 사탄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가지라고, 꼭 붙들고 있으라고 유혹한다. 내려놓는 순간 모두 잃어버릴 거라고 말하면서, 후히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려놓으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내려놓을 때 주어지는 가장 좋은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평강이다. 불교나 뉴에이지 사상도 우리에게 비우라고 가르치지만 그것은 비우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비우라고 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것에 있다.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믿음으로 걷는 광야의 나그네 길

1994년 겨울 어느 기도원에서, 나는 중고등부 교사로서 수련회에 참여했다. 수련회 첫날 기도회 중에 원장님과 담임목사님이 학생들에게 안수를 해주셨다. 나도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면서 안수해주시기를 바랐다. 그런데 기도원 원장님의 손이 내 머리에 닿았을 때 특별한 성령의 은혜가 임했다. 내 속 깊은 곳에서 불덩이 같은 것이 입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그분은 나를 위해 두 가지를 기도하셨다. “학문의 길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소서. 그리고 유학의 길이 활짝 열리게 하소서.” 실은 이 두 가지는 내가 수련회 기간 동안 응답 받기를 원했던 마음의 소원들이었다. 원장님의 입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나의 소원을 알고 계심을 확인시켜주셨다. 하나님께 직접 묻고 분별하여 나아갈 능력도 없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깊이 있는 깨달음도 없었던 내게 하나님은 누군가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예비하심에 대해 각인시켜 주신 듯하다.

 

당시 나의 관심사는 중국사와 중앙아시아사였다. 학부 졸업 논문을 중국 청대 서부지역의 무슬림 반란의 경과와 발생 원인에 대해 썼다. 나는 내가 왜 그 부분을 연구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 주제로 계속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지도교수님은 유학을 가고 싶다면 페르시아나 인도사와 같은 중동 지역사로 전공을 바꿔서 나갈 것을 권하셨다. 나는 ‘과연 내가 새로운 분야를 시작할 수 있을까?’, ‘그 동안 애써 공부했던 것을 버려두고 굳이 새것을 붙잡아야 하는 것일까?’를 놓고 몇 주간 기도하던 끝에, 어느 날 예배 중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렇다, 믿음은 내가 익히 아는 익숙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인도하심을 따라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그런 길을 선택해 나아가는 것이다.’ 결국 나는 이 모든 과정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그 때의 기도시간은 나의 진로뿐 아니라 배우자에 대한 하나님의 예비하심도 깨닫게 해주었으며, 훗날 정확한 타이밍에 만나게 된 아내와의 연합으로 인해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후배들이 우리에게 어떤 점이 좋아서 결혼하기로 결정했느냐고 물었을 때, 아내는 대답했다. “우리의 영혼이 서로 닮았다고 느꼈어요.” 실은 그 대답은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아내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맑다고 느꼈다. 그것이 내가 그녀에게 매력을 느꼈던 가장 큰 이유였다. 결혼 뒤 나는 하버드대학교에서 입학 허가를 받았고, 그곳에서 유학 생활을 하기로 결정했다. 하나님은 우리 두 사람을 더 깊이 만나주시려고 그 멀고 깊숙한 광야로 우리를 이끄셨던 것이다.

광야에서 만나주신 하나님

남들에게는 세계 최고의 명문 대학으로 일컬어지는 교육 기관에서 박사과정을 한다는 것이 영광스러운 기회로 비쳐질지 모르겠지만, 그곳에서 나는 깊은 좌절감을 느껴야 했다. 바닥에서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태어나서 그전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낮은 자존감을 느끼고 있었다. 유학 생활 초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거듭된 징표와 그로 인한 확신에도 불구하고 전공을 바꾸어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 영혼도 육체도 쉽게 고갈되곤 했다.

 

성경에서 제시하는 하나님의 한 단면은 광야의 하나님, 나그네의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단련 받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나안 농경 지대에 들어가면 가나안 사람들이 믿고 있는 풍요의 신을 철저히 배격하라고 명하셨다. 당시 농경 지대에서 추구하던 신의 이미지는 풍요, 다산, 비, 재물, 음란 등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것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의 고난 속에서 만난 하나님과는 다른 이미지였다. 따라서 가난하고 가진 것 없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으로 비쳐질 수 있는 신관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많은 경우 고난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세상과 분리되어 옛 자아가 죽고 하나님의 빛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상과의 마찰이 빚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일관되게 기술했듯이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이 땅에 대해서는 나그네이고 이방인이다.

 

나는 유학 첫 1년 동안 겪은 고통의 시간을 통해 점차적으로 내 삶의 성패에 대해 자유할 수 있었다. 내가 그동안 추구하던 성공이라는 것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되었고, 학문적 또는 사회적 성공에 대해서도 비교적 초연해졌다. 내 능력에 대해서는 기대할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나보다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되었다.

 

1997년 여름, 시카고에서 열린 북미 코스타 기간 마지막 날, 나는 내 삶에서 2년의 시간을 하나님께 드려서 선교사의 삶을 살기로 헌신했다. 마치 야곱이 형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외삼촌댁으로 피하는 과정에서 벧엘에서 하나님께 서원하던 심정과 유사하다고나 할까. 야곱은 당시 자기가 외삼촌댁에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하나님이 더 이상 아버지 이삭과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만이 아닌, 자신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고백했다. 아울러 자신의 소유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로 소유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했다. 내가 선교사로 서원할 당시 나의 마음 밑바닥에도 야곱이 느꼈던 절망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던 것 같다.

 

2004년 9월, 나는 박사과정을 마치고 8년간의 유학생활을 정리한 후 몽골로 들어갔다. 우리 부부는 선교할 나라를 놓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었다. 부부가 같이 섬길 수 있는 곳을 알려주시면, 그 응답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도구로 삼고 그곳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알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곧 몽골이 우리에게 좋은 사역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무렵 나는, 나의 박사과정 졸업논문이 유목 제국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몽골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영양학을 전공한 아내도 몽골 아이들의 심각한 영양 결핍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몽골이 각자의 전공을 가지고 섬기기에 좋은 장소라고 생각했다.

 

아내는 30개월 된 동연이를 데리고 한국에 가서 처가댁에 아이를 맡기고는 몽골로 먼저 들어갔다. 일주일 후 내가 한국에 가서 동연이를 만났을 때, 아이는 내게 울며 매달렸다. “엄마가 나한테 ‘빠이빠이’ 하고 혼자 갔어.” 동연이는 이 말을 되풀이했다. 아이에게 큰 충격이었던 것 같았다. 그런 아이를 데리고 책을 사러 서점에 갔다. 여행 전문서적의 몽골편을 골라 들었는데 표지에 사막 사진이 있었다. 나는 동연이에게 물었다. “동연아, 너 여기 가고 싶니?” “아니.”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엄마가 지금 여기 가 있는데도?” “그럼 갈래요. 거기 좋아.” 동연이에게는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이 사막인지 아닌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엄마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엄마와 함께라면 어떤 곳에서도 행복할 수 있었다.

 

 

2부 가장 좋은 것을 붙들기 위한 내려놓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미래의 계획을 내려놓는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인생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방식을 일견해보면 그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의 삶에서 하나님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분이신지 쉽게 느낄 수 있다. 만약 우리가 기도 가운데 그 길이 하나님이 정하신 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움직인다면 어려운 일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더욱 쌓아가게 만드는 도구에 불과할 뿐임을 깨닫게 된다. 반대로 하나님께 묻지 않고 혼자 결정해서 길을 가는 사람들은 어려운 문제가 닥치면 피해 가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더 전망 있고 안전한 길을 모색하지만 늘 불안하고 피곤할 뿐이다. 인생의 짐이 무겁게 느껴지기만 할 것이다.

 

근래 들어 한국 사회는 더 정신없이 분주해져 간다. 특별히 IMF의 충격과 이후 바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중독 증상이 사람들 사이에 퍼진 것 같다. 그 배후에는 우리가 시간을 잘못 경영하면 인생을 허비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작용하는 것 같다. 그러나 무조건 시간을 아끼려고 노력한다고 인생을 허비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안에서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순전히 의지할 때, 우리는 시간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고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지 않게 된다.

“세월을 아끼라”는 성경 구절은 많은 경우 더 열심히 물리적 시간을 절약하며 살라는 뜻으로 이해되어 왔다. 헬라어에는 시간에 해당하는 단어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물리적인 시간을 지칭하는 ‘크로노스’이고, 다른 하나는 때, 즉 기회를 뜻하는 ‘카이로스’이다. 성경에서 세월을 아끼라고 할 때 나오는 단어는 카이로스로, 하나님의 때를 말한다. 그러므로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잡으라는 뜻이다.

 

우리가 애써 추구하는 일들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무의미한 반복일 수 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기회를 놓치게 만드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정작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이루어진 것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완벽한 스케줄과 타이밍 가운데 계셨다는 것이며 당신이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실 인류구원의 계획을 신뢰하시면서 당신이 받아야 할 그 고통의 잔을 받으셨다는 데 있다. 그 믿음과 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의 온전하신 계획이 다 이루어졌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를 읽으셨고 그 기회를 잡으셨다.

 

최근 나는 약 15년 전에 받았던 비전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며 내 인생의 방향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섬세한 인도하심에 대해 깊이 있게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2006년 1월 말 중국 신장 지구의 주도(主都)인 우루무치에서 중국, 중앙아시아, 그리고 중동 지역의 사역자들이 모이는 선교 컨퍼런스가 열렸는데, 나는 이 모임에 강사 자격으로 참석해서 아시아의 선교 역사를 강의했다. 컨퍼런스 순서 가운데 상하이 연합 한인교회 엄기영 목사님의 설교는, 내가 유학을 떠나기 전에 나의 진로를 두고 기도하며 품었던 ‘요셉과 다니엘의 삶’이라는 비전을 되살아나게 했다. 목사님은 요셉이 꿈을 꾸고 싶어서 꿈을 꾼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전하셨다. 그 꿈은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자신의 욕심을 가지고 세운 미래의 계획과 비전을 종종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라고 착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이 가지신 비전이 무엇인지를 묻고 그 비전에 자신을 의탁하는 것이다. 내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것을 붙드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요셉과 다니엘에게는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고 또 이상이나 몽조를 해석하는 지혜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외국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면서 외국인과 함께 자신의 디아스포라 민족을 섬겼다. 두 사람의 궁극적인 소망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이었다. 현실적으로 그들은 당시 세상을 지배하는 민족들을 치리하는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들의 삶의 목표가 아니었다. 그들의 궁극적인 꿈은 하나님나라의 실현이었던 것이다.

 

1989년 당시 아무도 몽골에 선교사로 나간 사람도 없었고 중국도 개방되어 있지 않은 시절, 나는 ‘중국 서북 지역의 무슬림의 반란’을 주제로 학부 졸업논문을 썼다. 그리고 석사과정에서 중앙아시아사로, 그 후 박사과정에서 중동사로 연구 방향을 옮기게 되었다. 컨퍼런스에 모인 사역자들이 사역하는 대상 국가들을 모두 전공 영역으로 다루었던 것이다. 돌아보니 거의 20년 전인 학부 1학년 때부터 이분들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은 나를 준비시키신 것이다. 그때는 왜 하나님께서 자꾸만 낯선 방향으로 나를 몰아가시는지 이해가 안 갔지만 컨퍼런스를 통해 비로소 그 뜻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15년 전 수련회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요셉과 다니엘의 삶’으로 이끄시겠다고 하신 뜻을 깨달았다. 그것은 무엇보다 내가 다른 나라에 흩어져 있는 한인들을 섬기도록 인도하시겠다는 뜻이었다. 내가 몽골에서 몽골의 거민(居民)을 섬기면서 또한 여러 나라를 다니며 한인 공동체와 연결되어 그들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오랜 계획 가운데 인도하심을 받은 결과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실제로 내가 2004년부터 유학생을 섬기는 코스타 사역으로 부르심을 입게 된 것도 이러한 일련의 인도하심과 무관하지 않았다. 나의 소망이 이 땅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성취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더욱 선명해졌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유학이라는 광야 길을 거쳐 계속해서 몽골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는 자로 살라는 소명을 주신 것이다.

 

텅 빈 물질 창고까지 하나님께 내려놓는다

나의 유학 시절, 물질과 관련된 주된 훈련은 하나님의 채워주심을 신뢰하는 것이었다. 언젠가 나와 아내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몽골로 들어가기 전까지 미국에서도 물가가 가장 비싼 지역에서 두 사람이 박사과정을 하면서 아이 둘을 키우는 데 사용된 비용을 계산해 보았다. 장학금을 포함해 대략 35만에서 40만 불이라는 비용이 필요했음을 깨달았다. 이 액수의 금액이 사용된 것은 분명한데 어떻게 해서 이 돈이 채워졌는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무지 설명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분이 공급하시는 방식에서 제약을 받지 않으시고 다양한 창조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신다. 때로는 큰 돈이 나가지 않도록 돈 나갈 구멍을 막아주기도 하신다. 한번은 3년째 쓰던 노트북 컴퓨터가 너무 무겁게 느껴진 적이 있었다. 학교 도서관으로 들고 다니면서 작업하기에는 평소 약한 무릎에 무리가 올 정도였다. 그래서 하나님께 하소연했다. “하나님, 노트북이 너무 무거워요. 좀 가벼운 노트북 컴퓨터가 있으면 논문 작업하기가 훨씬 편할 것 같아요.” 그런데 일주일 후에 갑자기 컴퓨터가 켜지지 않는 사태가 발생했다. 서비스센터에 맡겼더니, 그것을 고치는 데 필요한 해당 부품이 품절되었고 기종 변환으로 인해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다는 연락이 왔다. 그러면서 마침 내가 노트북을 살 당시에 3년짜리 품질 보증보험을 들었는데 만료 시기까지 일 주일가량이 남아 있으니 신형 노트북으로 기종을 바꾸어 보상해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기도하고 난 후 열흘 만에 새 컴퓨터를 손에 넣게 되었다.

 

돌아보면 이러한 공급이 절묘한 타이밍에 이루진 것들이 수도 없다. 8년간의 유학 기간 동안 통장 잔고가 100불 이하로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할 때 우리는 경제적인 문제에서도 자유함을 누리게 됨을 유학 8년 동안 구체적으로 체험했던 것이다. 내 필요를 채우는 공급자로 사람을 생각할 때 아내와 나는 실망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기도 했다. 기대했던 사람에 대한 서운함이나 아쉬움 같은 감정들은 근본적으로는 내가 나의 임시적 공급처에 목을 맬 때 오는 현상이었다.

 

한편, 내가 유학 기간 동안 받은 물질에 관한 훈련이 주로 하나님의 채워주심을 신뢰하는 것이었다면, 몽골에서 받은 물질에 대한 훈련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그것은 주로 나눔의 방식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뢰하는 것이었고, 내가 소유하는 물질에 대한 권리를 내려놓는 훈련이었다. 이 훈련은 몽골에 도착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몽골국제대학교에서 첫 강의를 한 날, 강의실에서 신형 노트북 컴퓨터를 잃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학생들이 가져갔다는 생각에 낙담이 되었다. 그 컴퓨터는 내 재산목록 1호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귀중한 파일들이 들어있었다. 몽골에 온 것에 대한 회의가 생기면서 실망감이 몰려오니까 모든 의욕이 상실되는 것 같았다.

 

주일에 교회에 가서 기도하다가, 그 동안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내 것을 주장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았다. 그러다가 이것이 영적 싸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몽골에 처음 온 사람들이 초기 정착 과정에 이러한 일들을 겪게 되면, 무기력해지면서 몽골 땅과 몽골 사람들에게 환멸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 사실을 상기하자 사탄이 그러한 일들을 이용한다는 것에 대해 경각심이 생겼다. 하나님께서 “그것조차 나를 위해 버릴 수 있니?”라고 물으시는 것 같아 그러겠노라고, 컴퓨터를 찾고 못 찾고의 여부를 떠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뻐한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몽골 땅과 몽골 사람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이겠다고 기도했다. 그러자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나를 휘감았다. 그 후로도 몽골에서의 사역을 방해하려는 사탄의 계략은 계속되었으나 우리가 사탄의 생각과 반대 방향, 즉 적극적으로 나누는 자세로 나아갈 때 분쇄됨을 다시 확인했다.

 

교회에 무언가 받을 것을 기대하고 오는 사람들이 대체로 많은 상황에서, 그들에게 주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너무 어렵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주고 나누고 섬기는 도리에 대해 설교하기로 결정했다. 돈의 영을 이기지 못하면 예수의 제자는 결코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줄 때 양심의 가책을 따르는 경우가 많은데, 양심은 우리가 신뢰할 만한 출처가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실제로 몽골에서는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의 양심에 따라 누군가에게 돈을 주어 속고 또 관계마저 깨지는 경우를 자주 본다. 교인들 중에는 극도로 사정이 어려운 분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그분들을 도와야 한다는 충동과 그들로 하여금 기도해서 스스로 하나님께 얻게 해야 한다는 두 가지 지침 가운데 어느 것을 택해야 하는지가 늘 숙제였다.

 

어느 날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나를 찾아왔다. 그 분은 리더로서 교회를 섬기는 분이기 때문에 병원에 갈 일이 있거나 급한 가정사가 생기면 개인적으로 돕곤 했다. 그 분 동생이 깡패들에 의해 눈 한쪽을 잃게 되어 인도에 가서 수술을 받기 위해 남편의 영업용 자가용을 저당 잡혔는데 이틀 뒤까지 갚지 못하면 차가 넘어간다고 했다.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그분에게 함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자고 말하고 돌려보냈다. 그런데 이틀 동안 기도하며 하나님께 물었으나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면 그냥 자의로 필요한 돈의 일부를 주어버리는 것으로 결정하겠다고도 했다. 돈을 안 주는 것이 주는 것보다 어려운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과정 가운데 내 안에 돈을 주어 책임을 면하고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했다.

 

“베풀고자 하는 마음까지도 하나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결국 응답이 없었고, 그래서 나는 집사님께 솔직히 말씀드렸다.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응답이 없었습니다. 저는 드리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응답이 없이는 돈을 주거나 빌려드릴 수 없습니다.” 이틀 뒤 지방에 갔다가 그 분의 소식을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 집사님이 차를 저당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과 돈이 필요해서 내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땅 가운데 깊이 뿌리박혀 있는 거짓의 영이 어떻게 교인들 가운데 움직이는지 새삼 절감했다. 그러고 나니 왜 하나님께서 기도 가운데 응답지 않으셨는지를 알 수 있었다.

 

돈이 내 손에 있더라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물질을 의탁 받은 청지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줄 때,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서나 어떤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특히 교회가 선교비를 보내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가 순전한 동기로 주는 것인지 기도 중에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우리 손에 있는 물질을 사용할 때 하나님의 뜻을 묻고 사용하는 훈련을 한다면 우리는 선한 청지기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생명과 안전에 대한 염려마저 내려놓는다

아내가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정신없이 논문 자격시험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부터 아내는 팔에 통증을 느끼고 팔을 잘 움직이지 못했다. 내가 아내를 위해 기도하려고 아픈 팔을 잡았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회개하고 내려놓아야 할 것이 있음을 깨닫게 하셨다. 당시 아내는 시험을 앞두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아내의 불안감을 만지기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내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공부를 시작했고 하나님을 위해 공부한다는 명목은 있었지만, 어느새 공부가 하나님의 것이 아닌 자기 것이 되면서 자신을 옥죄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비전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 비전을 이루어가면 되는지 묻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식에는 위안과 쉼이 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비전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부족함이나 상황의 절박함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얼마 후 하나님은 아내의 건강에 대해 한 번 더 우리 가정에 물음을 던지셨다. 논문 자격시험을 몇 주 남겨둔 시점에서 아내가 산부인과에 진찰을 받으러 갔다가, 가슴에 난 작은 멍울이 발견된 것이다. 의사는 종양이 작아서 악성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세한 검사를 먼저 해보자고 제안했다. 이 말을 듣고 아내와 나는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생각은 마구 발전해서 ‘혹시 아내가 암이라면…’ 하는 데까지 미쳤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는 최악으로 혹시 아내를 잃는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니?’

 

실은 정말 묻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고, 대답하고 싶지도 않았다. 차라리 나의 생명에 관련된 질문이 더 쉽겠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언젠가는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고 이 부분을 놓고 기도했다. 쉽지 않았지만 결국 아내도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 의탁하는 것이 옳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아내의 건강이나 생명과 관련된 일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도했다. 그 부분도 모두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고 하나님은 그분의 선하신 뜻 가운데 최상의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신다는 것과, 그 최상의 것이 우리의 눈에 보기 좋은 것과는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했을 때, 내 마음속에 평안이 흘러들어왔다.

 

기도 가운데 나는 하나님께서 그 상황 가운데 개입하고 계심을 느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힘들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게 하시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아내의 생명까지도 하나님께 내려놓는 시험을 이미 통과했기 때문에, 더 이상 그 문제가 우리를 괴롭히지 않을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이것은 그냥 지나가는 과정이에요. 결코 이 문제가 우리 가정에 더 이상 어려움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당신은 안전해요.”

 

믿음이란 결국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확신함으로 현재를 사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대로 아내의 종양은 악성이 아니었고 아내는 건강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얼마 후 아내의 논문 자격시험 당일에 아내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그 기쁨을 아내에게 전했다. “여보, 당신은 시험에 이미 합격했어요. 편안한 마음으로 시험장에 가면 돼요.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시험을 이미 통과했기 때문에 이번 자격시험은 지나가는 통과의례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아내는 시험에 합격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의 죽음을 통해서도 하나님나라를 확장해 가신다. 이러한 죽음이 실패가 아닌 승리가 되는 이유는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안식의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부흥의 씨앗인 몽골에서 순교한 순교자를 생각하면서, 양과 염소의 차이에 대해 묵상할 기회가 있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시겠다고 한다. 양은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존재를 상징한다. 염소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백성이다. 양과 염소의 차이는 죽임을 당할 때 극명하게 드러난다. 양은 죽임을 당하는 것을 알아도 전혀 반항하지 않는다. 칼에 목이 베여 피가 내장으로 흘러들어가는 순간까지 그저 그 선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조용히 숨을 거둔다. 그러나 염소는 죽기 전에 심한 저항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후를 맞는 양과 염소의 모습 중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나는 과연 어느 쪽인지 생각해보았다. 우리가 우리의 최후나 극한 상황을 어떤 모습으로 맞이하는가가 곧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양인지 염소인지를 분별해줄 것이다. 또한 우리가 실패했을 때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가 우리 신앙의 성숙도를 보여줄 것이라고 믿는다.

 

결과를 예상하는 경험과 지식을 내려놓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경험과 지식을 사용하신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믿음을 통해 초자연적인 일들을 이루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의 경험이나 지식을 내려놓고 하나님만을 신뢰하기를 요구하실 때가 있다. 우리는 정상적인 상황 속에서는 정상적인 결과만 보게 된다. 평범한 것들을 기대하고 예상할 수 있는 것들을 바란다면 그 이상의 것들을 보기 어렵다. 특별한 것들을 소망하고 기도 가운데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려면 특별한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상식적이지 않은 것을 요구하기도 하시고, 때로는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으로 우리가 전진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믿음의 분량을 키워주시기 위해서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초청에 응해서 우리의 전체를 맡길 때, 하나님은 놀라운 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우리 믿음의 반응만큼 하나님의 경이로우심을 체험하게 된다.

 

미국 유학 시절 애리조나 주의 호피 인디언 부족이 사는 곳으로 단기선교를 간 적이 있었다. 그 과정 가운데 나는 내 경험과 지식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일하심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2002년 봄 케임브리지 연합 장로교회는 그 교회 최초의 단기선교를 준비하고 있었고, 나도 선교부장으로서 그 일에 동참하고 있었다. 당시 교회는 호피와 나바호 인디언을 섬기던 장두훈 선교사님을 후원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작스럽게 선교사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LA에서 구호물품을 받아 차로 운반하던 중 난 사고였다. 수중에 타이어 살 돈이 없어서 싸구려 재생 타이어를 사용했는데 그 타이어가 사고의 원인이었다는 것이었다. LA에서 장례식을 마치고 교회로 돌아와서 이 사실을 나누면서 많이 울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우리가 준비하던 단기선교 일정을 취소해야 할 분위기였다. 단기팀과 함께 금요 철야예배 때 기도하고 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따르자고 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이 많은 눈물을 주셨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 혹시 두훈이 대신 그곳에 가줄 수 있겠니?” 하나님은 장 선교사님의 빈자리에 우리가 잠시 있어주기를 원하셨고, 나는 울면서 대답했다. “하나님, 그곳에 우리 팀을 재워줄 곳이 없을지라도, 그 땅 사람 중에 우리를 맞아줄 사람이 없을지라도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그 땅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몰랐지만, 그저 부르심 가운데 그 땅에 있다가 오는 것, 그것이 우리 단기선교의 목표였다.

 

다음날 일정을 놓고 단기선교 팀원들 간에 의견 차이가 생겼으나 우리는 순교자의 무덤에서 예수님의 피를 되새기는 것을 호피 땅으로 가는 관문으로 삼는 것이 옳다고 결론 내렸다. 호피 마을로 들어가는 차 안에서 순교자의 피, 예수의 피의 자취를 따라 걸어가는 것에 대해 묵상하면서 나는 계속 울었다. 호피 부족을 찾아간 단기선교는 엄청난 기적과 은혜의 시간이 되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인도하심 가운데 압도되었던 순간을 경험했다. 우리가 몇 가지 준비해온 것들은 현지의 상황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새롭게 준비해야만 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것들을 다 내려놓고 순전히 하나님만 바라보기를 원하신다는 메시지를 모든 팀원들에게 주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신뢰하면 할수록 우리 앞에 기대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들이 펼쳐졌다. 다리 한쪽을 잃은 채, 사탄의 음악을 하고 주술적인 문양을 팔아 돈을 버는 청년이 우리를 만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90세 넘은 할머니가 예수님을 영접했고, 영어를 하지 못하는 형제자매들을 통해서도 아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마지막 예배 때 영접 설교를 마쳤을 때, 80명의 아이들 중 60여 명이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곳에 다녀온 다음 해에 새로운 선교사가 그 땅에 들어가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의 단기선교는 장 선교사님의 빈자리를 채울 다른 사람이 오기 전 그 땅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몽골에서도 단기선교팀을 받을 때 그들이 자신이 준비한 것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사역하도록 권면한다.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고 미지의 영역으로 믿음만을 가지고 들어가는 훈련이 되지 않는다면 단기선교에서 얻을 것이 제한된다. 믿음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낳게 마련이다. 더 가진 사람이 더 갖는 것이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더 큰 믿음을 누리게 된다.

 

죄와 판단의 짐을 내려놓는다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와 맞닥뜨리게 되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죄된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 대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갖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죄인 된 모습을 끊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끊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죄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죄와 하나님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삶의 어느 부분에 하나님의 빛이 비춰질 때 하나님으로부터 숨으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를 간섭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온전케 하시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싫어하고 경멸하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의 삶과 생각 속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죄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것들이 깨끗이 씻겨지기를 열망할 수 있다.